핸드드립, 물 한 방울에 담긴 철학
3년간의 핸드드립 여정을 통해 깨달은 물의 과학, 온도의 미학, 그리고 기다림의 철학을 담은 개인적이고 실용적인 가이드입니다.
첫 드리퍼와의 만남
"이거 하나면 카페 안 가도 되겠네요!"
친구의 집에서 처음 핸드드립 커피를 마셨을 때 한 말이에요. 친구가 정성스럽게 물을 부으며 커피를 내리는 모습이 마치 다도를 하는 것처럼 경건해 보였거든요. 그 향기, 그 맛, 그리고 그 시간의 여유로움에 완전히 매료되었죠.
다음 날 바로 드리퍼를 사러 갔어요. 가게 직원이 물었죠.
"어떤 드리퍼 찾으세요? V60? 칼리타? 멜리타?"
그때의 저는 그게 뭔지도 몰랐어요. 그냥 예쁜 걸로 골랐죠. 하리오 V60, 투명한 유리로 된 원뿔 모양의 드리퍼였어요.
집에 와서 신나게 커피를 내렸는데... 맛이 이상했어요. 시큼하고, 떫고, 밍밍하고. 친구 집에서 마신 그 맛은 온데간데없었죠.
물줄기와의 전쟁
첫 번째 깨달음: 물도 기술이다
처음엔 물 붓는 게 뭐가 어렵겠나 싶었어요. 그냥 쭉 부으면 되는 거 아닌가?
큰 착각이었죠.
유튜브를 보니 다들 가느다란 물줄기로 동심원을 그리며 우아하게 붓더라고요. 저는? 폭포수처럼 콸콸 쏟아붓고 있었죠. 커피 가루가 이리저리 튀고, 한쪽으로만 물이 고이고...
"아, 주전자가 문제구나!"
그래서 구즈넥 드립포트를 샀어요. 가느다란 주둥이가 달린 전용 주전자죠. 그런데도 여전히 물줄기 조절이 안 되더라고요. 손이 떨려서 물이 뚝뚝 끊기거나, 너무 세게 나가거나...
한 달 정도 연습했을까요? 어느 날 갑자기 물줄기가 일정하게 나가기 시작했어요. 마치 자전거 타기를 배울 때처럼, 어느 순간 '아!' 하고 감이 오더라고요.
두 번째 발견: 온도의 미학
물 온도 때문에 얼마나 고생했는지 몰라요.
처음엔 "뜨거운 물이면 되겠지" 하고 펄펄 끓는 물을 바로 부었어요. 커피가 쓰고 탄 맛이 났죠.
그 다음엔 너무 식혀서 70도 정도의 물을 부었더니 신맛만 강하고 밍밍했어요.
온도별 실험 결과
온도 | 특징 | 맛 프로필 |
---|---|---|
85도 | 밝은 로스팅에 적합 | 과일향은 살아있지만 너무 가볍고 신맛이 강해요 |
90도 | 균형적 | 신맛과 단맛의 균형이 좋아요 |
93도 | 중간 로스팅 최적 | 바디감이 생기고 초콜릿 같은 맛이 나요 |
95도 이상 | 다크 로스팅용 | 쓴맛이 강해지기 시작해요 |
원두마다, 로스팅 정도마다 적절한 온도가 달라요. 밝은 로스팅은 높은 온도(92-94도), 진한 로스팅은 낮은 온도(88-90도)가 좋더라고요.
온도의 과학: 1도가 만드는 차이
어느 날, 온도에 대한 집착이 생긴 저는 온도계 두 개를 동시에 사용하는 실험을 했어요. 하나는 드립포트 안에, 하나는 커피 베드(커피층)에 꽂아두고 온도 변화를 관찰했죠.
물이 이동하면서 생기는 온도 손실
- 드립포트 안: 92도
- 포트 주둥이 끝: 88도 (4도 손실!)
- 커피 베드 도착: 85도 (또 3도 손실)
- 서버에 떨어질 때: 75도
무려 17도나 떨어지더라고요! 그래서 이제는 시작 온도를 정할 때 이 손실분을 고려해요.
계절별 온도 전략
겨울엔 모든 도구가 차가워서 온도 손실이 더 커요. 그래서:
- 여름: 93도에서 시작
- 겨울: 95도에서 시작
- 드리퍼와 서버 예열은 필수!
한번은 영하의 날씨에 창가에서 드립을 했는데, 평소보다 5도나 높게 시작했는데도 커피가 미지근하더라고요. 그날 이후로 겨울엔 모든 도구를 뜨거운 물로 두 번씩 예열해요.
세 번째 시행착오: 시간과의 싸움
블루밍의 과학: 커피가 숨 쉬는 순간
"블루밍(Blooming)"이라는 말을 아세요?
커피에 처음 물을 부으면 부풀어 오르는 현상이에요. 신선한 원두일수록 이산화탄소가 많아서 크게 부풀죠.
처음엔 이 과정을 무시하고 그냥 쭉 부었어요. 그러니 커피가 제대로 우러나지 않더라고요.
이제는 이렇게 해요:
- 원두 양의 2배 정도 물을 부어요 (15g 원두면 30g 물)
- 30초 정도 기다려요 (커피가 숨 쉬는 시간)
- 나머지 물을 천천히, 일정하게 부어요
전체 추출 시간은 2분 30초에서 3분. 이 시간을 지키는 게 생각보다 어려워요. 너무 빨리 끝나면 신맛만 나고, 너무 오래 걸리면 쓰고 떫어요.
왜 커피가 부푸는가?
로스팅 과정에서 커피 내부에 갇힌 CO2가 뜨거운 물을 만나 급격히 팽창하면서 빠져나와요. 이 과정이 왜 중요할까요?
- 가스 배출: CO2가 남아있으면 물이 커피 입자 속으로 들어가는 걸 방해해요
- 균일한 적심: 가스가 빠지면서 모든 입자가 골고루 젖어요
- 추출 준비: 세포벽이 열리면서 맛 성분이 나올 준비를 해요
블루밍으로 읽는 커피의 신선도
- 로스팅 후 1-3일: 거품이 넘칠 정도로 부풀어요 (너무 신선!)
- 4-14일: 적당히 부풀고 30초면 안정돼요 (최적!)
- 15-30일: 부풀긴 하지만 약해요 (아직 괜찮아요)
- 30일 이상: 거의 부풀지 않아요 (향이 많이 날아갔어요)
한번은 로스팅 날짜를 깜빡하고 오래된 원두로 드립을 했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블루밍이 없더라고요. 마치 죽은 커피에 물을 붓는 느낌이었어요.
블루밍 시간의 비밀
왜 하필 30초일까요? 저도 궁금해서 10초부터 60초까지 실험해봤어요.
- 10초: CO2가 아직 다 빠지지 않아 채널링 발생
- 20초: 대부분의 가스는 빠졌지만 아직 불안정
- 30초: 가스 배출 완료, 입자가 안정적으로 젖음
- 45초: 이미 추출이 시작되어 첫 물의 성분이 과다 추출
- 60초: 첫 부분은 쓰고, 나머지는 싱거운 불균형한 커피
30초가 정답인 이유? 가스는 다 빠지고, 아직 본격적인 추출은 시작되지 않은 조화로운 타이밍이더라고요.
블루밍 물의 양에 대한 논쟁
커피계에는 오래된 논쟁이 하나 있어요. 블루밍할 때 서버에 커피가 떨어지면 안 된다는 주장이죠.
한번은 커피 선배가 제 블루밍을 보더니 혼을 냈어요.
"야! 벌써 커피가 떨어지잖아. 그러면 안 돼!"
그런데 저는 궁금했어요. 왜 안 될까?
실험해봤죠. 312번이나.
실험 결과
- 물 30ml (떨어지지 않음): 균일한 적심 실패, 중앙만 과다 추출
- 물 40ml (약간 떨어짐): 가장 균형 잡힌 맛
- 물 50ml (많이 떨어짐): 첫 추출이 희석되어 전체적으로 밍밍
결론? 약간 떨어지는 게 오히려 좋더라고요. 1980년대 일본식 핸드드립의 관습이 아직도 남아있는 거였어요.
드리퍼별 성격 탐구
하리오 V60: 예민한 천재
제 첫 드리퍼 V60는 정말 예민해요. 물 붓는 속도, 각도, 타이밍... 모든 게 완벽해야 좋은 맛이 나요.
처음엔 너무 어려워서 포기하고 싶었어요. 하지만 어느 날, 모든 조건이 딱 맞아떨어졌을 때 나온 그 커피 맛! 꽃향기가 폭발하고, 과일의 단맛이 입안 가득 퍼지는데...
"아, 이래서 V60를 쓰는구나!"
싶었죠. 마치 까다로운 친구 같아요. 기분 좋을 때는 우수한 선물을 주지만, 기분 나쁠 때는 철저히 외면하는.
V60의 비밀: 60도 각도의 마법
V60의 이름에 숨겨진 비밀, 아시나요? 바로 60도예요. 드리퍼 내부 벽면의 각도가 정확히 60도로 설계되어 있죠.
유체역학의 관점
60도 각도는 물이 중력에 의해 아래로 흐를 때 가장 이상적인 속도를 만들어요. 너무 가파르면(45도 이하) 물이 너무 빨리 빠져 추출 부족, 너무 완만하면(75도 이상) 물이 고여 과다 추출이 일어나죠.
나선형 리브의 역할
- 공기 통로 확보: 종이 필터와 드리퍼 사이 공간 유지
- 유속 조절: 물의 흐름을 나선형으로 유도해 접촉 시간 증가
- 열 보존: 공기층이 단열 효과를 만들어 온도 유지
코안다 효과의 적용
더 훌륭한 건, V60가 '코안다 효과'를 활용한다는 거예요. 코안다 효과란? 유체가 곡면을 만나면 직진하지 않고 곡면을 따라 흐르는 현상이에요.
V60의 원뿔 형태는 이 효과를 향상해요. 물이 벽면을 따라 나선형으로 돌면서 커피 입자와의 접촉 시간을 늘려주죠. 마치 토네이도처럼요.
칼리타 웨이브: 든든한 친구
V60에 지쳐있을 때 칼리타 웨이브를 만났어요. 평평한 바닥에 구멍 3개. 단순한 구조지만 그게 장점이었어요.
물을 좀 빨리 부어도, 좀 느리게 부어도 일정한 속도로 빠져나가요. 실패할 확률이 확 줄어들죠.
맛은 V60보다 부드럽고 균형이 잘 잡혀있어요. 화려함은 덜하지만 안정적이죠. 매일 아침 부담 없이 마시기 좋은 커피를 만들어줘요.
웨이브의 과학: 평평함의 미학
칼리타 웨이브의 평평한 바닥은 단순해 보이지만 과학적 원리가 숨어있어요.
3개 구멍의 황금 비율
왜 하필 3개일까요?
- 1개: 중앙 집중으로 채널링 위험
- 2개: 불균형한 흐름
- 3개: 삼각형 배치로 가장 균일한 추출
- 4개 이상: 가장자리 과다 추출
웨이브 필터의 비밀
주름진 웨이브 필터도 그냥 예쁘라고 만든 게 아니에요:
- 표면적 20% 증가: 더 많은 공기 접촉
- 단열 효과: 주름 사이 공기층이 온도 유지
- 유속 안정화: 물이 여러 경로로 분산
실제로 온도를 재보니 V60보다 2-3도 높게 유지되더라고요.
클레버 드리퍼: 스마트한 해결사
"이게 진짜 드립이야?"
클레버 드리퍼를 처음 봤을 때 든 생각이에요. 밑에 밸브가 달려있어서 커피를 우려낸 다음 한 번에 내려요.
실패가 거의 없어요. 원두 넣고, 물 붓고, 4분 기다리고, 내리면 끝. 맛도 일정하고 깔끔해요.
가끔 "이건 진정한 핸드드립이 아니야"라는 순수주의자들의 시선을 받기도 하지만, 저는 이렇게 생각해요. 맛있으면 그만 아닌가요?
클레버의 과학: 침출과 여과의 결합
클레버 드리퍼는 프렌치프레스의 침출식과 핸드드립의 여과식을 결합한 하이브리드예요.
왜 4분인가?
침출 시간에 따른 추출률을 측정해봤어요:
- 2분: 추출률 16% (너무 싱거워요)
- 3분: 추출률 18% (약간 부족)
- 4분: 추출률 20% (딱 좋아요!)
- 5분: 추출률 22% (쓴맛 시작)
- 6분: 추출률 24% (과다 추출)
SCA(Specialty Coffee Association)가 권장하는 이상적인 추출률이 18-22%인데, 4분이 정확히 그 중간이더라고요.
밸브의 역할
단순해 보이는 실리콘 밸브가 사실은 엄청난 일을 해요:
- 조화로운 밀폐: 추출 중 온도 유지
- 일정한 유속: 중력만으로 균일한 배출
- 침전물 분리: 미분이 바닥에 가라앉은 후 배출
원두와의 대화
분쇄도라는 변수
그라인더를 처음 샀을 때, 분쇄도 조절이 이렇게 중요한지 몰랐어요.
너무 굵게 갈면 물이 그냥 통과해버려서 밍밍한 커피가 되고, 너무 가늘게 갈면 물이 안 빠져서 쓴 커피가 돼요.
설탕 알갱이 정도? 굵은 소금 정도?
매번 조금씩 조절하면서 최적점을 찾아가는 과정이 마치 라디오 주파수 맞추기 같아요. 딱 맞는 순간, 모든 맛이 선명하게 들리기 시작하죠.
원두의 신선도
"로스팅 날짜가 왜 중요해요?"
처음엔 이해가 안 됐어요. 커피는 오래 둘수록 숙성되는 거 아닌가?
아니었어요.
갓 볶은 원두(3일 이내)는 가스가 너무 많아서 맛이 불안정하고, 한 달이 지난 원두는 향이 다 날아가 밋밋해요.
최적기는 로스팅 후 1-2주. 이때 원두가 가장 아름다운 맛과 향을 보여줘요.
실패의 기록들
대참사 1: 종이 맛 커피
어느 날 커피에서 이상한 맛이 났어요. 뭔가... 종이 맛?
알고 보니 필터를 미리 적시지 않아서였어요. 종이 필터는 꼭 뜨거운 물로 한 번 헹궈야 해요. 종이 냄새도 없애고, 드리퍼도 예열하고, 일석이조죠.
대참사 2: 채널링의 악몽
커피가 한쪽으로만 쏠려서 추출되는 현상, 채널링(Channeling).
물을 한 곳에만 계속 부으면 그쪽으로만 길이 생겨서 제대로 추출이 안 돼요. 결과는? 어떤 부분은 과다 추출되어 쓰고, 어떤 부분은 덜 추출되어 시큼한 괴상한 맛의 커피.
이제는 나선형으로, 안에서 밖으로, 고르게 적시며 부어요.
대참사 3: 미분의 습격
싸구려 그라인더를 쓸 때의 일이에요.
커피를 갈면 고운 가루(미분)가 많이 생겼어요. 이게 필터를 막아서 물이 안 빠지더라고요. 추출 시간은 5분이 넘어가고, 커피는 엄청나게 쓰고...
결국 좋은 그라인더에 투자했어요. 비싸긴 했지만, 커피 맛이 확 달라졌어요. 역시 장비빨은 무시할 수 없더라고요.
나만의 레시피 찾기
이제 저만의 기본 레시피가 생겼어요:
디폴트 레시피 (V60 기준)
- 원두: 15g (미디엄 로스트)
- 물: 250g (92도)
- 분쇄도: 굵은 설탕 정도
- 시간: 2분 30초
추출 과정
하지만 이건 그저 시작점일 뿐이에요. 원두마다, 기분마다, 날씨마다 조금씩 바꿔가며 그날의 최적점을 찾아가요.
황금 비율의 진실: 1:17이 정답일까?
커피와 물의 비율, 정말 고민 많이 했어요. 유명 바리스타들은 저마다 다른 비율을 추천하더라고요.
비율별 특성 (제 경험)
- 1:13 - 진하고 묵직해요. 에스프레소가 그리울 때
- 1:15 - 표준적인 맛. 대부분의 원두에 무난
- 1:17 - 제가 가장 좋아하는 비율. 깔끔하고 섬세해요
- 1:20 - 차(tea)처럼 가볍게 마시고 싶을 때
그런데 이 비율도 핵심적이지 않아요. 왜냐하면...
원두가 머금는 물의 양
재미있는 실험을 해봤어요. 15g의 원두로 드립을 하고, 사용한 커피 퍽의 무게를 재봤더니 무려 45g! 원두가 자기 무게의 2배 정도 물을 머금더라고요.
그래서 실제로 마시는 커피는:
- 부은 물: 250g
- 원두가 머금은 물: 30g
- 실제 추출량: 220g
이걸 고려하면 1:17도 실제로는 1:14.7 정도인 셈이죠.
물 붓기의 미학: 나선형 vs 중앙 집중
나선형 붓기
안에서 밖으로, 다시 밖에서 안으로. 마치 달팽이 집을 그리듯이요.
- 장점: 고른 추출, 채널링 방지
- 단점: 기술이 필요, 일정한 속도 유지가 어려움
중앙 집중 붓기
가운데만 계속 부어요. 물이 알아서 퍼져나가게 두는 거죠.
- 장점: 쉬워요, 일정한 맛
- 단점: 가장자리 추출 부족 가능성
제 방식: 하이브리드
처음 블루밍 때는 나선형으로 전체를 적시고, 본 추출 때는 중앙 70% + 가장자리 30% 비율로 부어요. 이렇게 하니 균일하면서도 효율적이더라고요.
분쇄도 미세 조정: 그라인더 클릭의 비밀
좋은 그라인더를 사고 나서 알게 된 건데, 한 클릭 차이가 엄청난 변화를 만들어요.
계절별 분쇄도 조정
- 봄/가을: 기준점
- 여름 (습도 높음): 1-2클릭 굵게
- 겨울 (건조함): 1클릭 가늘게
원두 상태별 조정
- 신선한 원두 (7일 이내): 1클릭 굵게
- 적정 원두 (7-21일): 기준점
- 오래된 원두 (21일 이상): 1클릭 가늘게
한번은 같은 원두인데 맛이 계속 달라서 고민했는데, 알고 보니 매일 습도가 달라서였어요. 지금은 습도계를 옆에 두고 체크해요. 과하다 싶으시죠? 하지만 이런 디테일이 쌓여서 일정한 맛을 만드는 거예요.
핸드드립이 준 선물
아침의 의식
이제 아침마다 커피 내리는 시간이 하루의 시작을 알리는 의식이 되었어요.
원두 가는 소리, 물 끓는 소리, 커피 향기... 이 모든 게 "오늘도 시작이구나"라고 말해주는 것 같아요.
바쁜 아침이지만 이 10분만큼은 온전히 저를 위한 시간. 물을 부으며 오늘 할 일을 생각하고, 커피를 마시며 마음을 정돈해요.
대화의 시작
"어떻게 이런 커피를 집에서 만들어요?"
집에 온 손님들이 자주 하는 말이에요. 그럼 신나서 드리퍼 설명부터 시작해서 물 온도, 추출 시간까지 열정적으로 떠들죠.
어떤 분들은 진짜로 관심을 갖고 드리퍼를 사가기도 하고, 어떤 분들은 그냥 "역시 카페가 편해"라고 하기도 해요.
둘 다 좋아요. 각자의 커피 스타일이 있는 거니까요.
물의 과학, 그리고 한 걸음 더
물이 품은 비밀: TDS와 미네랄의 세계
핸드드립을 3년 하고 나서야 깨달은 충격적인 사실이 하나 있어요.
"물이 커피 맛의 98%를 좌우한다"
처음엔 믿기지 않았어요. 원두가 중요하지, 물이 뭐가 그렇게 중요해?
그런데 한번은 같은 원두로 서울 집과 제주도 여행지에서 각각 커피를 내렸는데, 완전히 다른 맛이 나더라고요. 원두도 같고, 드리퍼도 같고, 레시피도 같은데 말이죠.
물의 TDS(Total Dissolved Solids)
- 50ppm 이하: 너무 연수, 추출력 부족
- 75-150ppm: 이상적인 범위
- 150-250ppm: 약간 경수, 쓴맛 증가
- 250ppm 이상: 과도한 경수, 스케일 문제
집에 TDS 측정기를 사서 재봤더니:
- 서울 수돗물: 120ppm
- 제주 지하수: 45ppm
- 시판 생수들: 30-300ppm (천차만별!)
그래서 이제는 물도 블렌딩해요. 정말이에요. 수돗물 70% + 증류수 30% 섞어서 100ppm 정도로 맞춰요.
미네랄의 역할
- 칼슘: 단맛과 바디감 증가
- 마그네슘: 밝은 산미와 과일향 강조
- 나트륨: 단맛 증폭, 과하면 짠맛
- 중탄산염: pH 조절, 산미 중화
한번은 증류수로만 커피를 내려봤어요. 맛이... 텅 비었더라고요. 미네랄이 커피 성분을 끌어내는 '자석' 역할을 한다는 걸 실감했죠.
붓기 속도의 물리학
고속카메라로 물줄기를 찍어본 적이 있어요. (네, 저도 제가 이 지경일 줄은...)
이상적인 유속
- 블루밍: 5ml/초 (천천히)
- 1차 추출: 7ml/초 (적당히)
- 2차 추출: 9ml/초 (조금 빠르게)
- 마무리: 5ml/초 (다시 천천히)
물줄기 굵기도 중요해요:
- 가는 물줄기(3-4mm): 정밀한 컨트롤, 온도 손실 큼
- 중간 물줄기(5-6mm): 균형적, 가장 무난
- 굵은 물줄기(7mm 이상): 빠른 추출, 교반 효과
그라인더의 진실: 균일도가 전부다
432만원짜리 그라인더를 질렀을 때 주변에서 다들 미쳤다고 했어요.
하지만 입자 분석을 해보니...
그라인더별 입자 균일도
- 블레이드 그라인더: 100-2000μm (20배 차이!)
- 입문용 버 그라인더: 200-1200μm (6배)
- 중급 버 그라인더: 300-900μm (3배)
- 고급 버 그라인더: 400-800μm (2배)
균일할수록 모든 입자가 동일하게 추출돼요. 결과? 깨끗하고 명확한 맛.
추출 곡선의 비밀
전문 바리스타들이 쓰는 '추출 곡선'을 집에서도 적용해봤어요.
이상적인 추출 곡선
시간(초) | 무게(g) | 유속(g/초) |
---|---|---|
0-30 | 30 | 1.0 (블루밍) |
30-60 | 100 | 2.3 |
60-90 | 150 | 1.7 |
90-120 | 200 | 1.7 |
120-150 | 250 | 1.7 |
일정한 유속을 유지하는 게 포인트예요.
커피 과학의 최전선
최근에 알게 된 훌륭한 사실들:
냉동 원두의 비밀
원두를 -20°C로 냉동 후 바로 분쇄하면 입자가 더 균일해져요. 열 발생도 줄어들어 향 보존에도 좋고요.
초음파 추출
초음파를 이용한 추출 실험을 해봤는데, 추출 시간이 절반으로 줄면서도 수율은 오히려 높아지더라고요. 미래의 커피 추출법이 될지도?
물 분자 클러스터
자화수나 수소수로 커피를 내리면 맛이 달라진다는 연구가 있어요. 물 분자의 클러스터 크기가 추출에 영향을 준다는 이론인데, 아직은 의견이 분분해요.
마치며: 물 한 방울의 철학
핸드드립은 단순히 커피 만드는 방법이 아니에요.
기다림의 미학이고, 정성의 결과물이고, 나를 위한 작은 사치예요.
실패도 많았고, 아직도 가끔 망치기도 해요. 하지만 그 과정 자체가 즐거워요. 오늘은 어떤 맛이 날까? 이 원두는 어떤 비밀을 숨기고 있을까?
매일 같은 원두, 같은 물, 같은 드리퍼를 써도 매번 조금씩 다른 맛이 나요. 그게 핸드드립의 매력이죠.
가끔 "그냥 커피머신 사면 편한데 왜 이렇게 번거롭게 해?"라는 질문을 받아요.
그럴 때마다 이렇게 대답해요.
"물 한 방울 한 방울에 제 마음을 담을 수 있거든요."
오늘도 저는 조용히 물을 끓이고, 원두를 갈고, 천천히 물을 부어요.
그리고 생각해요.
오늘은 어떤 하루가 될까? 이 커피처럼 향기로운 하루가 되기를.
마지막 팁: 실패를 두려워하지 마세요
3년간 핸드드립을 하면서 깨달은 가장 중요한 것.
조화로운 커피는 없다는 거예요. 어제의 조화로운 레시피가 오늘은 별로일 수 있고, 남이 극찬한 방법이 내게는 안 맞을 수 있어요.
중요한 건 꾸준히 시도하고, 기록하고, 개선하는 거예요.
제 드립 노트에는 이런 것들이 적혀있어요:
- "2024.3.15 - 비 오는 날, 93도, 쓴맛 강함. 다음엔 90도로"
- "2024.7.20 - 새 원두 첫 시도, 과일향 폭발! 이 세팅 유지"
- "2024.12.1 - 그라인더 청소 후 맛이 확 달라짐. 주 1회 청소 필수"
이런 작은 기록들이 쌓여서 지금의 제 레시피가 만들어졌어요.
여러분도 자신만의 핸드드립 이야기를 만들어가시길 바라요.
그 여정이 커피만큼이나 향기롭기를!
그리고 언젠가 우연히 만나게 된다면, 함께 커피 한 잔 하면서 각자의 레시피를 공유해봐요.
그때까지, 향기로운 하루 되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