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크티 브런치 스타일 가이드

밀크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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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차와 우유의 균형잡힌 비율을 찾아서

147번의 실패, 그리고 깨달음

"너 이거 커피인지 홍차인지 모르겠다."

2018년 가을, 런던 킹스크로스 역 근처의 작은 카페. 첫 번째 밀크티를 내놓자마자 들은 영국인 손님의 평가였다. 자신만만하게 만든 밀크티였는데, 그 한마디에 무너졌다.

홍차와 우유. 단 두 가지 재료로 만드는 음료가 뭐가 그리 어렵다고. 그렇게 생각하며 시작한 밀크티 도전은 147번의 실패로 이어졌다. 우유를 먼저 넣느냐, 홍차를 먼저 넣느냐를 두고 150년 넘게 논쟁하는 영국인들의 집착이 이해가 되기 시작한 건, 100번째 실패를 넘어서면서부터였다.

1842년 베드퍼드 공작부인의 반란

"오후 4시의 공복감,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1842년, 베드퍼드의 공작부인 안나 마리아 러셀. 당시 영국 상류층은 아침을 푸짐하게, 점심은 간단하게, 저녁은 8시 이후에 만찬으로 먹는 게 관례였다. 점심과 저녁 사이의 긴 공백. 배고픔을 참다 못한 안나는 몰래 하녀에게 차와 가벼운 음식을 가져오게 했다.

처음엔 부끄러워 숨어서 먹었다. 하지만 곧 친구들을 초대하기 시작했고, 그것이 애프터눈 티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밀크티가 있었다.

뜨거운 홍차에 찬 우유를 넣으면 바로 마시기 좋은 온도가 된다. 홍차의 떫은맛은 우유의 단백질과 만나 부드러워진다. 상류층의 허기를 달래주던 이 음료는 곧 계급을 넘어 퍼져나갔다.

계급의 음료 - 우유가 먼저냐, 홍차가 먼저냐

MIF(Milk In First)? TIF(Tea In First)?

영국에 가면 꼭 받는 질문이다. 한국의 '부먹 vs 찍먹' 논쟁처럼, 영국인들은 150년 넘게 이 문제로 싸워왔다.

역사적 배경

18세기, 값비싼 본차이나 찻잔을 살 수 없었던 노동계급은 싸구려 도자기를 썼다. 뜨거운 홍차를 바로 부으면 깨질 수 있어서, 찬 우유를 먼저 넣어 온도를 낮췄다. 반면 귀족들은 "내 찻잔은 비싸니까 뜨거운 차를 바로 부어도 괜찮아"라는 과시를 했다.

2003년, 영국왕립화학회는 과학적 실험 끝에 결론을 내렸다. "우유를 먼저 넣어야 한다." 75도 이상에서 우유 단백질이 변성되어 맛이 떨어진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영국인들은 여전히 싸운다. 과학이 뭐든, 전통이 뭐든, 내 방식이 최고라고.

테아닌과 카페인의 황금 시너지

밀크티가 커피와 다른 이유는 단순히 카페인 양의 차이가 아니다.

홍차의 카페인 과학

  • 커피: 카페인 154mg/355ml (아메리카노 기준)
  • 홍차: 카페인 62mg/355ml (밀크티 기준)

하지만 중요한 건 양이 아니라 '작용 방식'이다.

테아닌(L-Theanine)의 마법

홍차에만 존재하는 아미노산 테아닌은:

  1. 혈뇌장벽을 통과해 뇌에 직접 작용
  2. 알파파(α-wave) 증가 - 명상 상태와 유사
  3. GABA 생성 촉진 - 긴장 완화
  4. 도파민, 세로토닌 분비 증가 - 기분 개선

카페인 + 테아닌 = 조화로운 조합

2008년 연구 결과, 카페인과 테아닌을 1:2 비율로 섭취하면:

  • 카페인의 부작용(떨림, 불안) 감소
  • 집중력과 인지 능력 향상
  • 지속 시간 연장 (3-4시간 → 6-8시간)

홍차 한 잔에는 카페인 62mg, 테아닌 24-30mg이 들어있다. 조화로운 1:2는 아니지만, 자연이 만든 적절한 배합이다.

우유가 더하는 효과

  • 카제인 단백질이 카페인 흡수 속도 완화
  • 유당이 테아닌과 시너지 효과
  • 칼슘이 신경 안정에 도움

첫 번째 도전 - 물맛 나는 밀크티

2018년 9월, 런던에서의 첫 도전.

한국에서 마시던 대로 만들었다. 홍차 티백을 뜨거운 물에 3분 우리고, 우유를 1:1로 섞었다. 맛을 보니... 싱겁다. 홍차 맛도, 우유 맛도 아닌 애매한 무언가.

"Dear, that's not milk tea. That's... colored water."

(얘야, 그건 밀크티가 아니야. 그건... 색깔 있는 물이지.)

옆 테이블의 영국인 할머니가 내 밀크티를 보더니 한마디 했다. 충격이었다. 분명 레시피대로 했는데.

홍차의 선택 - 아삼 vs 다즐링

"밀크티엔 아삼이지. 다즐링은 혼자 마시는 거야."

포트넘 앤 메이슨의 티 소믈리에가 가르쳐준 첫 번째 원칙이었다.

다즐링은 '홍차의 샴페인'이라 불릴 만큼 섬세하고 향긋하다. 하지만 우유를 넣으면 그 섬세함이 다 묻혀버린다. 반면 아삼은 강하고 몰트한 맛이 우유와 만나도 살아남는다.

직접 비교해봤다. 같은 조건에서 다즐링 퍼스트 플러시와 아삼 CTC로 밀크티를 만들었다. 다즐링은 정말 '색깔 있는 우유'가 됐고, 아삼은 진한 카라멜 색에 깊은 맛이 났다.

이후 잉글리시 브렉퍼스트, 아이리시 브렉퍼스트, 실론 등 다양한 홍차로 실험했다. 결론은 명확했다. 밀크티에는 강한 홍차가 답이다.

우유의 과학 - 온도와 지방의 마법

"전자레인지는 절대 안 돼!"

영국인 친구 제임스의 단호한 목소리가 아직도 귀에 맹맹하다. 그는 내가 전자레인지로 우유를 데우는 걸 보고 기겁했다.

"우유는 60-65도가 최적이야. 그 이상 가열하면 단백질이 변성돼. 게다가 전자레인지는 불균등하게 가열해서 맛이 망가져."

반신반의하며 실험해봤다. 같은 우유를 전자레인지, 스팀, 냄비 세 가지 방법으로 데워 비교했다.

전자레인지

표면에 막이 생기고, 일부는 너무 뜨겁고 일부는 미지근했다.

스팀

고르게 데워지고 미세한 거품이 생겼다. 벨벳 같은 텍스처.

냄비

계속 저어줘야 하지만, 온도 조절이 가장 정확했다.

그리고 또 하나의 발견. 저지방 우유는 밀크티에 어울리지 않는다. 홍차의 탄닌을 중화시킬 지방이 부족해 떫은맛이 그대로 남는다. 전지방 우유, 아니 가능하면 3.5% 이상의 우유가 최고다.

균형잡힌 비율의 발견 - 1:1은 틀렸다

"영국인은 홍차에 우유를 '살짝' 넣는 거야. 너희는 우유에 홍차를 넣잖아."

런던 플랫메이트 사라의 지적이었다. 한국에서는 밀크티하면 1:1이 기본이라고 배웠는데, 영국은 달랐다.

ISO 3103, 영국의 홍차 표준 규약을 찾아봤다. 매우도 홍차 300ml에 우유 5ml. 60:1의 비율이었다. 이건 너무 극단적이라 생각했지만, 실제로 영국인들의 밀크티를 관찰해보니 우유는 정말 '스플래시' 정도만 넣었다.

직접 실험을 시작했다. 홍차 200ml 기준으로 우유를 10ml부터 200ml까지 10ml씩 늘려가며 147잔을 만들었다. 매일 5잔씩, 한 달 동안.

10-30ml (20:1~7:1)

영국 정통. 홍차의 캐릭터가 살아있다.

40-60ml (5:1~3:1)

균형점. 홍차와 우유가 조화롭다.

70-100ml (3:1~2:1)

부드러움. 카페 스타일.

100ml 이상 (2:1~1:1)

한국/아시아 스타일. 디저트 음료.

정답은 없었다. 목적에 따라 달랐다. 홍차를 즐기려면 적게, 부드러운 음료를 원하면 많게.

로열 밀크티의 실패와 성공

"우유를 끓이면 안 돼요! 데워야죠!"

일본인 바리스타 유키의 조언이었다. 로열 밀크티는 일본에서 만든 레시피다. 1965년 립톤이 일본에서 처음 선보인 농후한 밀크티.

첫 시도는 대실패였다. 우유를 팍팍 끓이니 단백질이 응고되어 덩어리가 생겼다. 냄비 바닥은 타고, 우유 막은 두껍게 생기고.

두 번째는 약불로 조심조심. 그런데 이번엔 홍차가 제대로 우러나지 않았다. 우유의 지방이 찻잎을 코팅해서 추출이 안 되는 거였다.

수십 번의 시행착오 끝에 찾은 방법:

로열 밀크티 완벽 레시피

  1. 물 100ml를 먼저 끓인다
  2. 불을 끄고 찻잎 6g을 넣어 2분 우린다
  3. 우유 200ml를 넣고 약불로 65도까지만 가열
  4. 거품기로 살살 저어가며 3분 더 우린다

핵심은 '끓이지 않는 것'. 온도계 없이는 우유 표면이 살짝 김이 나기 시작할 때가 60-65도다.

문화의 충돌 - 한국식 밀크티

"이게 밀크티야? 이건 그냥 달달한 우유 아니야?"

2019년, 서울에 온 영국인 친구들과 카페에 갔을 때. 그들은 한국의 밀크티를 보고 경악했다. 우유가 너무 많고, 너무 달고, 너무 차갑다고.

문화의 차이였다. 영국에서 밀크티는 '홍차를 마시는 방법'이다. 한국에서 밀크티는 '음료' 그 자체다. 영국은 홍차가 주인공이고 우유는 조연. 한국은 둘 다 주인공이거나, 오히려 우유가 주인공.

흥미로운 건, 둘 다 나름의 역사가 있다는 것. 영국은 노동자들이 칼로리를 보충하기 위해 우유와 설탕을 많이 넣었다. 한국은 홍차가 생소했던 시절, 우유를 많이 넣어 거부감을 줄였다.

어느 쪽이 맞고 틀리고는 없다. 다만 목적이 다를 뿐.

세계의 밀크티 - 여행하며 만난 다양성

🇭🇰 홍콩 - 실크스타킹 밀크티

2019년 홍콩. 란퐁위엔에서 처음 맛본 실크스타킹 밀크티. 홍차를 실크스타킹 같은 천 주머니에 넣고 여러 번 우려낸다. 무가당 연유를 넣어 진하고 부드럽다.

"식민지 시절엔 신선한 우유가 귀했어. 그래서 연유를 썼지."

현지인의 설명이었다. 역사가 만든 맛이었다.

🇹🇼 대만 - 버블 밀크티

타이베이 춘수이당. 버블티의 원조집. 여기서 깨달은 건, 대만 밀크티는 '씹는 음료'라는 것. 타피오카 펄의 쫄깃함, 얼음의 시원함, 진한 홍차의 조화.

🇮🇳 인도 - 짜이

델리의 길거리. 양철 주전자에서 부글부글 끓는 짜이. 우유, 홍차, 설탕, 향신료를 한꺼번에 끓인다. 영국식과는 정반대. 그런데 맛있다.

"영국인들이 홍차를 가져왔지만, 우린 우리 방식으로 만들었어."

자부심 가득한 짜이왈라의 말이었다.

티백 vs 찻잎 - 편견을 깨다

"티백으로 제대로 된 밀크티를 만들 수 있을까?"

차 순수주의자들은 고개를 젓는다. 하지만 영국홍차협회 통계에 따르면, 영국에서 소비되는 홍차의 96%가 티백이다.

편견을 버리고 실험해봤다. 같은 브랜드의 찻잎과 티백으로 각각 밀크티를 만들어 블라인드 테스트.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10명 중 7명이 구분하지 못했다.

오히려 티백의 장점도 있었다:

  • 일정한 양으로 일정한 맛
  • 빠른 추출 (잘게 부순 CTC 방식)
  • 편리함 (찻잎 거르기 불필요)

단, 저가 티백은 피해야 한다. 종이 맛이 나거나, 찻잎의 품질이 떨어지면 우유를 넣어도 구제가 안 된다.

나만의 레시피 - 147번째 이후

147번의 실패 끝에 찾은 나만의 황금 레시피.

클래식 브리티시 스타일

재료

  • 아삼 홍차 3g (또는 티백 1개)
  • 끓는 물 200ml
  • 전지방 우유 30ml (실온)
  • 설탕 1티스푼 (선택)

만드는 법

  1. 찻잔을 뜨거운 물로 예열
  2. 95도 물로 홍차를 4분 우리기
  3. 우유를 먼저 잔에 붓기 (MIF 방식)
  4. 홍차를 우유 위에 천천히 붓기
  5. 부드럽게 저어주기

한국식 카페 스타일

재료

  • 아삼 CTC 또는 실론 5g
  • 끓는 물 150ml
  • 스팀 우유 150ml
  • 바닐라 시럽 20ml

만드는 법

  1. 홍차를 진하게 5분 우리기
  2. 우유를 65도로 스티밍
  3. 홍차에 시럽 넣고 섞기
  4. 스팀 우유를 천천히 붓기
  5. 우유 거품으로 마무리

개인적 베스트 - 허니 밀크티

재료

  • 얼그레이 4g
  • 85도 물 180ml
  • 저온살균 우유 50ml
  • 아카시아 꿀 15ml

만드는 법

  1. 얼그레이를 85도에서 3분 우리기 (향 보존)
  2. 우유를 55도로 데우기
  3. 꿀을 홍차에 녹이기
  4. 우유를 저으며 붓기

베르가못 향과 꿀의 조화, 저온살균 우유의 고소함이 일품이다.

실패의 기록 - 웃으며 돌아보는 147번

  • 1번: 홍차가 너무 연해서 우유맛만
  • 15번: 우유를 팔팔 끓여서 단백질 응고
  • 23번: 설탕을 너무 많이 넣어 물엿 맛
  • 47번: 고급 다즐링 사용했다가 돈만 날림
  • 62번: 두유로 시도했다가 비린맛
  • 78번: 얼그레이에 우유 1:1, 로션 맛
  • 93번: 보이차로 시도, 설거지물 맛
  • 105번: 전자레인지 5분, 우유 폭발
  • 128번: 녹차가루 실수로 투입, 말차라떼 탄생
  • 147번: 드디어 "This is proper tea!" 듣다

깨달음 - 밀크티는 관계다

147번의 실패를 통해 깨달은 것. 밀크티는 단순한 음료가 아니라 '관계'다.

홍차와 우유의 관계. 뜨거움과 차가움의 관계. 쓴맛과 부드러움의 관계. 전통과 변화의 관계. 계급과 평등의 관계. 동양과 서양의 관계.

영국 귀족이 시작했지만 노동자의 음료가 되었고, 식민지에서는 독립의 맛이 되었다. 홍콩에선 연유로, 대만에선 버블로, 인도에선 향신료로 변신했다.

마지막 잔 - 할머니를 위한 밀크티

2020년 겨울. 암 투병 중이던 할머니가 입맛이 없다고 하셨다. 문득 밀크티가 떠올랐다.

부드럽게, 달콤하게, 따뜻하게.
홍차는 약하게, 우유는 많이, 꿀도 듬뿍.
147번 동안 배운 모든 걸 잊고, 그저 할머니가 좋아하실 맛으로.

"이게 뭐니? 참 부드럽네."

할머니가 한 모금 마시고 미소 지으셨다. 그 순간 깨달았다. 우수한 밀크티는 누군가를 위해 만드는 밀크티라는 것을.

영국인이 뭐라 하든, ISO가 뭐라 하든, 과학이 뭐라 하든.
마시는 사람이 행복하면 그게 우수한 밀크티다.

에필로그 - 148번째 도전

지금도 매일 밀크티를 만든다. 더 이상 실패를 세지는 않는다.

아침엔 진한 아삼에 우유 살짝. 정신이 번쩍 든다.
오후엔 얼그레이에 우유 듬뿍. 나른함이 사라진다.
밤엔 디카페인에 꿀 넣어. 하루가 마무리된다.

가끔 영국인 손님이 와서 "Proper British tea!"라고 엄지를 치켜든다.
가끔 한국인 손님이 와서 "이게 진짜 밀크티네요!"라고 감탄한다.

둘 다 맞다. 밀크티는 그런 거니까.
전통을 지키면서도 변화를 받아들이는 것.
규칙을 알면서도 자유롭게 즐기는 것.

홍차와 우유, 단 두 가지로 만드는 다양한 가능성.
그게 밀크티의 매력이다.


"우유를 먼저 넣든, 홍차를 먼저 넣든, 중요한 건 함께 나누는 것이다."

2024년 12월, 148번째 밀크티를 우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