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카롱, 2,847번의 실패가 만든 조화로운 타원

마카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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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과 예술, 그리고 철학이 만나는 프랑스 과자의 정수

디저트 프랑스 마카롱 파티시에 📖 18분

생테밀리옹에서의 충격, 그리고 시작

2017년 10월, 보르도에서 한 시간 떨어진 작은 마을 생테밀리옹(Saint-Émilion).

와인 투어를 마치고 우연히 들어간 작은 제과점. 쇼윈도에는 볼품없이 납작한 갈색 과자들이 놓여있었다. "마카롱 드 생테밀리옹"이라는 팻말 앞에서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게 마카롱이라고?"

내가 아는 마카롱은 알록달록하고 동그란 샌드위치 모양이었는데, 이건 그냥... 쿠키였다.

호기심에 하나 사서 베어 물었다. 그리고 충격.

아몬드의 진한 향, 바삭하면서도 쫀득한 식감, 은은한 단맛. 화려하지 않았지만, 본질에 충실했다.

"이게 진짜 마카롱이에요. 1620년부터 우르술라 수녀원에서 만들던 레시피 그대로."

그날 나는 마카롱의 역사를 처음 알게 되었다. 그리고 한국으로 돌아와서 미친 듯이 마카롱을 만들기 시작했다.

2,847번의 실패 끝에, 나는 깨달았다.

마카롱은 단순한 과자가 아니라 과학이고, 예술이고, 철학이라는 것을.

이탈리아에서 프랑스로, 논란의 역사

마카롱의 기원은 여전히 논쟁 중이다.

이탈리아 설

8세기 베네치아 수도원에서 시작. 'Maccherone(두드리다)'에서 유래.

프랑스 설

791년 코르메리 수도원의 기록.

하지만 가장 유력한 건 1533년의 이야기다.

피렌체의 카트린 드 메디치가 프랑스 왕 앙리 2세와 결혼하면서 데려간 이탈리아 요리사들. 그들의 손에서 아몬드 페이스트로 만든 '아마레티'가 프랑스 땅을 밟았다.

그로부터 259년 후, 1792년.

프랑스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낭시의 두 수녀가 생계를 위해 마카롱을 팔기 시작했다. '마카롱 자매(Les Soeurs Macarons)'로 불린 그들의 가게는 전설이 되었고, 그 길은 지금도 '마카롱 자매의 길'로 불린다.

1830년, 파리의 혁명

하지만 우리가 아는 마카롱, 그 동그란 샌드위치 모양은 언제 탄생했을까?

두 가지 설이 있다.

라뒤레 설

1930년대 피에르 데퐁텡이 두 개의 코크 사이에 가나슈를 넣음

제르베 설

동시대 파리의 클로드 제르베가 개발

누가 먼저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이 순간부터 마카롱이 단순한 과자에서 예술품으로 진화했다는 것.

머랭, 그 달콤한 고통

마카롱 실패의 70%는 머랭에서 시작된다.

실패 일지 1~523번: 머랭과의 전쟁

처음엔 쉬울 줄 알았다. 달걀 흰자에 설탕 넣고 휘핑하면 끝 아닌가?

천만의 말씀.

1~100번 거품이 죽어버린 납작한 것들
101~200번 너무 딱딱해서 돌처럼 굳은 것들
201~300번 분리되어 버린 처참한 것들
301~400번 습도 때문에 망한 장마철 실패작들
401~523번 온도 1도 차이로 망한 것들

523번째 실패 후, 나는 깨달았다.

머랭은 단순한 거품이 아니라 단백질의 변성 과정이라는 것을.

머랭의 과학

달걀 흰자의 단백질(오브알부민, 오보뮤코이드)은 휘핑하면 펼쳐지면서 공기를 감싼다. 이때 설탕이 수분을 잡아주며 구조를 안정화시킨다.

프렌치 머랭

차가운 흰자 + 설탕 → 불안정하지만 가벼움

이탈리안 머랭

뜨거운 시럽(118°C) + 흰자 → 안정적이지만 무거움

스위스 머랭

중탕으로 60°C까지 가열 → 중간 정도

나는 347번의 실험 끝에 이탈리안을 선택했다. 초보자에게는 안정성이 최고니까.

하지만 한 가지 비밀이 있다.

흰자는 실온에 3일 이상 둔 것을 써야 한다. 신선한 흰자는 끈기가 너무 강해서 거품이 잘 안 생긴다. 묵은 흰자는 단백질 구조가 느슨해져서 쉽게 거품이 난다.

프랑스의 어느 유명 파티시에는 흰자를 일부러 6개월 숙성시킨다고 한다.

마카로나주, 영혼을 깎는 과정

실패 일지 524~1,847번: 마카로나주의 늪

마카로나주(Macaronage).

'마카롱을 만든다'는 뜻의 이 단어는 내게 1년간의 악몽이었다.

머랭에 아몬드 가루와 슈가파우더를 넣고 섞는 과정. 말은 쉽다. 하지만...

너무 적게 섞으면

표면이 울퉁불퉁, 뿔이 생김

너무 많이 섞으면

납작하게 퍼져서 프라이팬처럼 됨

습도가 높으면

아무리 섞어도 농도가 안 맞음

온도가 낮으면

버터처럼 뻑뻑해짐

정답은 뭘까?

"리본처럼 떨어지되 5초 안에 자국이 사라지는 농도"

이 애매모호한 표현 때문에 나는 1,323번을 실패했다.

그러다 깨달았다. 마카로나주는 과학이 아니라 감각이라는 것을.

J자를 그리며 바닥에서 들어올리기를 반복. 처음엔 뻑뻑하다가 점점 윤기가 돌기 시작한다. 그리고 어느 순간, 반죽이 말을 건다.

"그만."

주걱에서 떨어지는 반죽이 8자를 그리며 천천히 사라질 때. 그때가 바로 멈출 때다.

삐에, 그 1mm의 기적

실패 일지 1,848~2,453번: 삐에를 찾아서

삐에(Pied). 프랑스어로 '발'이라는 뜻.

마카롱 옆구리에 생기는 주름진 부분. 이게 없으면 마카롱이 아니라 그냥 쿠키다.

어떻게 하면 삐에가 생길까?

  • 건조 30분? 아니다. 날씨에 따라 10분~2시간까지 다르다.
  • 손으로 만져서 안 묻으면? 애매하다. 너무 말려도 문제다.
  • 150도? 160도? 170도? 오븐마다 다르다.

605번의 실패 끝에 찾은 답:

"반짝이는 막이 생길 때까지"

제대로 건조된 반죽은 빛을 받으면 반짝인다. 플라스틱 코팅을 한 것처럼. 그때 구우면 껍질은 굳어있고 안의 수분이 팽창하면서 옆으로 밀려나온다. 그게 바로 삐에다.

2,454~2,847번: 필링과 숙성의 미학

마카롱은 갓 만들었을 때 먹는 게 아니다.

처음엔 몰랐다. 바삭한 게 맞는 줄 알았다. 그런데 파리에서 사 먹은 마카롱은 겉은 바삭하지만 속은 쫀득했다.

비밀은 숙성이었다.

가나슈나 버터크림을 넣고 냉장고에서 24시간. 크림의 수분이 코크로 스며들면서 겉은 여전히 매끈하지만 속은 쫀득해진다. 이 과정을 '마튀라시옹(Maturation)'이라고 한다.

393번의 실패 끝에 깨달은 또 하나의 진실:

필링은 코크보다 약간 단단해야 한다. 너무 부드러우면 다 흘러나오고, 너무 딱딱하면 먹을 때 분리된다.

양대 산맥: 라뒤레 vs 피에르 에르메

프랑스 마카롱계의 영원한 라이벌.

라뒤레

1862년 창업

  • 클래식
  • 고전미
  • 머랭의 쫀득함

피에르 에르메

1998년 독립

  • 모던
  • 실험정신
  • 크림의 풍부함

2019년 파리 출장 때 양쪽을 다 먹어봤다.

라뒤레 로즈 마카롱을 먹는 순간, 19세기 파리의 살롱이 떠올랐다. 우아하고 정제된 맛.

피에르 에르메 이스파한(장미, 라즈베리, 리치)을 먹는 순간, 현대 미술관에 온 것 같았다. 대담하고 새로운 조합.

누가 더 나을까?

답은 없다. 클래식을 좋아하면 라뒤레, 모던을 좋아하면 피에르 에르메.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둘 다 2,847번은 실패했을 거라는 것.

뚱카롱, 그리고 한국적 진화

2018년 한국에 불어닥친 뚱카롱 열풍.

처음엔 비웃었다.

"필링이 코크보다 두꺼운 게 무슨 마카롱이야?"

프랑스 정통을 고집하던 나는 얇고 우아한 마카롱만 만들었다. 그런데 손님들이 물었다.

"필링 좀 더 많이 넣어주시면 안 돼요?"

처음엔 거절했다. 그러다 호기심에 한 번 만들어봤다. 필링을 듬뿍, 토핑도 올리고.

그리고 깨달았다.

"아, 이것도 진화구나."

프랑스가 이탈리아 과자를 자기 것으로 만들었듯이, 한국도 프랑스 과자를 한국식으로 재해석한 것이다. 인절미 마카롱, 흑임자 마카롱, 김치(!) 마카롱까지.

정통이 뭐 그리 중요한가. 맛있으면 그만이지.

2,847번의 실패가 가르쳐준 것

이제 나는 눈 감고도 마카롱을 만들 수 있다.

손끝으로 느껴지는 머랭의 무게감, 마카로나주할 때 들리는 소리, 건조된 반죽의 반짝임, 오븐에서 피어오르는 삐에.

하지만 여전히 가끔 실패한다.

습도가 높은 날, 오븐 컨디션이 안 좋은 날, 내 컨디션이 안 좋은 날.

그래도 괜찮다.

2,847번 실패했으니 2,848번째도 못 할 게 뭐 있나.

마카롱은 그런 거다. 실패를 먹고 자라는 과자.

매번 조금씩 다르고, 그래서 매번 조금씩 특별하다.

어제의 마카롱과 오늘의 마카롱은 다르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정성은 같다.

때로는 마카로니라고 놀림받고, 때로는 마크롱이라고 농담거리가 되지만.

그래도 마카롱은 마카롱이다.

실패를 딛고 일어선, 조화로운 타원.

마카롱 만들기: 2,847번의 실패를 3시간으로 줄이는 법

재료 (30개 분량)

코크

  • 아몬드 파우더: 125g
  • 슈가파우더: 225g
  • 계란 흰자: 90g (실온 3일 숙성)
  • 설탕: 25g
  • 색소: 적당량

가나슈

  • 다크초콜릿: 200g
  • 생크림: 200ml
  • 버터: 20g

만드는 법

1

준비

아몬드 파우더와 슈가파우더를 3번 체친다. 뭉친 건 과감히 버려라. 아까워하다 실패한다.

2

머랭

  • 프렌치: 흰자에 설탕을 3번 나눠 넣으며 단단하게
  • 이탈리안: 118°C 시럽을 흰자에 부으며 휘핑

초보자는 이탈리안 추천. 실패 확률 30% 감소.

3

마카로나주

J자 그리기. 처음엔 뻑뻑하다가 점점 윤기. 8자가 5초 안에 사라지면 스톱.

4

파이핑

3cm 간격. 수직으로 짜고 돌리지 말고 끊기. 팬을 탁탁 쳐서 공기 빼기.

5

건조

반짝이는 막이 생길 때까지. 습도 60% 이상이면 선풍기 필수.

6

굽기

150°C 15분. 삐에가 3분 안에 올라오지 않으면 온도를 10도 올려라.

7

숙성

냉장고에서 24시간. 서두르지 마라. 마카롱은 기다림의 미학이다.

실패해도 괜찮다.

나도 2,847번 실패했다.

당신은 그보다 훨씬 빨리 성공할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