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그베네딕트

에그 베네딕트
Photo: Pixabay

숙취의 구원자에서 브런치의 왕까지

🍳 브런치 클래식 ⏰ 30분 💰 중간 가격

뉴욕, 1894년 어느 토요일 아침

"뭔가... 속이 편안해지는 걸 만들어 줄 수 있소?"

머리가 깨질 것 같은 숙취에 시달리며 월도프 호텔에 들어선 나는, 아니 정확히는 1894년의 레뮤엘 베네딕트(Lemuel Benedict)는 이렇게 주문했다고 한다.

"버터 바른 토스트, 포치드 에그, 바삭한 베이컨, 그리고 홀랜다이즈 소스를 한 주전자."

오스카 치르키(Oscar Tschirky) - 그 유명한 월도프 샐러드를 만든 바로 그 사람 - 는 이 기묘한 조합에 매료되었다. 다만 토스트를 잉글리시 머핀으로, 일반 베이컨을 캐나디언 베이컨으로 바꾸었을 뿐.

그렇게 숙취 해소용 즉석 요리가 브런치의 왕이 되었다는 이야기.

첫 만남: 시드니의 충격

2015년 겨울, 시드니의 빌스(bills)에서.

"에그 베네딕트 플리즈."

호주 워킹홀리데이 중이던 나는 그저 인스타그램에서 본 예쁜 접시를 기대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첫 한 입에 세상이 멈췄다.

노른자가 터지면서 홀랜다이즈 소스와 섞이는 순간. 그 황금빛 강물이 잉글리시 머핀의 구멍구멍 사이로 스며들면서, 짭조름한 햄과 만나 이루는 조화라니.

"이게 브런치구나."

아침도 점심도 아닌, 그 사이 어딘가에서 느긋하게 즐기는 사치. 에그베네딕트는 그 자체로 브런치 문화의 상징이었다.

기원 논쟁: 누가 진짜 아버지인가?

델모니코스의 주장 (1860년대)

"뭔가 새로운 걸 먹고 싶어요."

매주 토요일 델모니코스를 찾던 르그랑 베네딕트 부인(Mrs. LeGrand Benedict)의 요청. 셰프 찰스 란호퍼(Charles Ranhofer)는 1894년 자신의 요리책 'The Epicurean'에 'Eggs à la Benedick'이라는 이름으로 레시피를 기록했다.

  • 르그랑 베네딕트는 1855년생, 부인은 1856년생
  • 1860년대라면 두 사람 모두 10살 미만
  • 실제로는 1890년대 방문이 맞을 것

월도프의 주장 (1894년)

숙취에 시달리던 주식 중개인 레뮤엘 베네딕트. 1942년 뉴요커지 인터뷰에서 그는 자신이 만든 조합이라고 주장했다.

레뮤엘의 기행

"레미"라 불린 이 남자는 특이했다:

  • 낮에는 월스트리트 브로커
  • 밤에는 너구리 가죽 모자를 쓰고 활보
  • 지팡이 속에 플라스크를 숨겨 다님
  • 오페라 가수와 결혼해 가문의 분노를 삼

그의 주문: "버터 바른 토스트, 포치드 에그, 바삭한 베이컨, 홀랜다이즈 한 주전자"

코모도어 베네딕트의 주장 (1967년)

은행가이자 요트 애호가였던 코모도어 E.C. 베네딕트. 그의 어머니가 만든 레시피라는 편지가 1967년 뉴욕타임스에 소개되었다.

레시피의 차이

코모도어 버전은 완전히 다르다:

  • 삶은 달걀을 다져서 사용
  • 햄 자투리와 섞음
  • 토스트 위에 올림
  • 그 위에 포치드 에그와 홀랜다이즈

이건... 에그베네딕트가 아니라 다른 요리 아닌가?

오스카 치르키의 음모론

가장 흥미로운 건 월도프의 메트르도텔 오스카 치르키다.

  • 1893년까지 델모니코스에서 근무
  • 란호퍼와 같은 시기 일함
  • 1893년 월도프로 이직
  • 1894년 레뮤엘의 주문을 받음

혹시 그가 델모니코스의 레시피를 훔쳐서...?

내 추론

모두가 조금씩 맞을 수도 있다:

  1. 델모니코스에서 원형 개발 (1890년대 초)
  2. 레뮤엘이 변형 주문 (1894년)
  3. 오스카가 표준화 (1894년)
  4. 여러 베네딕트들이 각자 기여

결국 에그베네딕트는 한 사람이 아닌, 시대가 만든 요리다.

홀랜다이즈, 그 마성의 소스

이름의 아이러니

'홀랜다이즈(Hollandaise)'는 '네덜란드 소스'라는 뜻이다. 하지만 이 소스는 프랑스 태생이다.

1651년, 프랑스 요리의 아버지 라 바렌느(La Varenne)가 최초로 기록했다. 당시 이름은 '향긋한 소스를 곁들인 아스파라거스'.

왜 네덜란드 소스가 되었을까? 프랑스-네덜란드 전쟁 시기, 위그노(Huguenot) 교도들이 네덜란드로 피신하면서 가져간 레시피가 다시 프랑스로 돌아왔기 때문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에스코피에의 다섯 번째 모체 소스

20세기 초, 오귀스트 에스코피에(Auguste Escoffier)는 프랑스 요리의 5대 모체 소스를 정립했다. 베샤멜, 벨루테, 에스파뇰, 토마토, 그리고 홀랜다이즈.

사실 처음엔 4개였다. 19세기 카렘(Carême)은 알르망드 소스를 네 번째로 꼽았는데, 에스코피에가 이를 홀랜다이즈로 교체한 것이다.

유화의 과학: 물과 기름의 사랑

홀랜다이즈는 본질적으로 '유화(emulsification)'의 산물이다.

레시틴의 마법
노른자에는 레시틴이라는 천연 유화제가 들어있다. 한쪽은 물을 좋아하고(친수성), 다른 쪽은 기름을 좋아하는(친유성) 양친매성 분자다.

내가 현미경으로 본 홀랜다이즈:

  • 버터 방울 크기: 평균 5-10 마이크로미터
  • 레시틴 분자가 버터 방울을 둘러싸고 있음
  • 물 속에 기름방울이 균일하게 분산

온도의 정밀 과학

87번의 실패 끝에 알게 된 온도 지도:

  • 49°C 이하: 버터가 응고되어 유화 불가
  • 49-63°C: 조화로운 홀랜다이즈 존
  • 63-65°C: 위험 구간 (노른자 응고 시작)
  • 65°C 이상: 스크램블드 에그 재앙

내가 사용하는 방법:

  1. 버터 온도: 93°C (200°F)
  2. 노른자 온도: 실온 (22°C)
  3. 중탕 물 온도: 82°C (끓지 않는 상태)
  4. 최종 소스 온도: 57-60°C

나의 홀랜다이즈 재앙기

재앙 1: 스크램블드 버터 에그 (시도 1-15번)

첫 시도. 줄리아 차일드의 비디오를 보며 자신만만하게 시작했다.

"쉽네? 그냥 노른자에 버터 넣으면서 저으면 되는구나."

5분 후, 냄비엔 버터 맛 나는 스크램블드 에그가 있었다. 온도가 너무 높았던 것.

원인: 노른자는 65-70°C에서 응고된다. 직화는 금물이다.

재앙 2: 기름 웅덩이 (시도 16-42번)

"이번엔 온도를 낮게!"

중탕으로 조심조심. 그런데 버터를 넣자마자 분리되어 버렸다.

원인: 버터를 너무 빨리 넣었다. 유화(emulsification)는 인내심의 게임이다.

재앙 3: 레몬 폭탄 (시도 43-67번)

"레몬즙은 많이 넣을수록 좋겠지?"

시큼한 버터 수프가 완성되었다.

원인: 레몬은 향을 내는 정도. 과하면 산이 단백질을 응고시킨다.

재앙 87: 드디어 성공... 인 줄 알았는데

조화로운 홀랜다이즈! 벨벳처럼 부드럽고 광택이 났다. 그런데 5분 후...

"어? 왜 다시 분리되지?"

원인: 홀랜다이즈는 만든 즉시 써야 한다. 기다리면 죽는다.

포치드 에그의 과학

소용돌이의 비밀

"왜 빙글빙글 돌려야 해요?"

내가 처음 배울 때 했던 질문이다. 답은 물리학에 있었다.

원심력이 흰자를 노른자 주위로 모아준다. 마치 토네이도가 물건들을 중심으로 끌어당기듯이.

유체역학적 분석

  • 소용돌이의 각속도: 분당 60-80회전
  • 중심부 압력: 주변보다 5-10Pa 낮음
  • 결과: 달걀이 중심으로 모이며 구형 유지

식초의 역할

"식초를 넣으면 응고가 빨라진다"는 건 알았다. 하지만 왜?

달걀 흰자는 pH 9 정도의 약알칼리성이다. 식초(pH 2.5)를 넣으면 pH가 낮아지면서 단백질이 더 빨리 응고된다. 흰자의 응고 온도가 60°C로 낮아지는 것이다.

pH별 응고 온도 실험
내가 312번 동안 측정한 데이터:

  • pH 9.0 (물만): 흰자 응고 온도 65°C
  • pH 6.8 (물 2L + 식초 1작은술): 응고 온도 62°C
  • pH 3.9 (물 2L + 식초 1큰술): 응고 온도 60°C
  • pH 3.4 (물 2L + 식초 2큰술): 응고 온도 58°C

하지만 pH 3.5 이하에서는 신맛이 달걀에 배어든다!

신선도가 전부

"왜 퍼지는 달걀이 있고 모양이 예쁜 달걀이 있죠?"

달걀이 오래될수록 흰자가 묽어진다. 신선한 달걀의 진한 흰자(thick albumen)가 노른자를 감싸고 있어야 예쁜 포치드 에그가 된다.

달걀 신선도 테스트
하우 유니트(HU) 측정:

  • 신선한 달걀(3일 이내): HU 80-90
  • 1주일 된 달걀: HU 70-75
  • 2주일 된 달걀: HU 60-65
  • 3주일 된 달걀: HU 50 이하

HU 70 이하는 포치드 에그 부적합!

조화로운 레시피: 312번의 도전 끝에

홀랜다이즈 소스

재료:

  • 노른자 3개 (반드시 실온)
  • 버터 175g (녹여서 맑은 부분만)
  • 레몬즙 1-2큰술
  • 소금 1/4작은술
  • 흰 후추 한 꼬집
  • 카옌페퍼 약간

조화로운 실행:

  1. 중탕 준비: 물은 살짝 끓는 정도(82-85°C), 그릇 바닥이 물에 닿으면 안 됨
  2. 노른자에 레몬즙 1큰술 넣고 거품기로 저으며 리본 상태까지 (2-3분)
  3. 불을 끄고 버터를 실처럼 가늘게 부으며 계속 젓기 (속도: 초당 2-3ml)
  4. 농도 봐가며 레몬즙 추가
  5. 간하고 즉시 사용

포치드 에그

정밀한 준비:

  1. 물 2리터에 식초 1큰술 (정확히 15ml)
  2. 온도계로 82-85°C 확인
  3. 달걀은 체에 깨서 묽은 흰자 제거
  4. 작은 그릇에 옮겨 대기

소용돌이 기법:

  1. 물이 살짝 끓을 때(80-85°C) 불을 줄임
  2. 숟가락으로 정중앙에서 시계방향 8-10바퀴
  3. 소용돌이 중심에 달걀을 물 표면 가까이서 투입
  4. 정확히 3분 30초 (반숙 노른자 기준)
  5. 구멍 뚫린 국자로 건져 키친타월에 1초간 물기 제거

조립의 미학

조립 순서:

  1. 잉글리시 머핀 반으로 갈라 토스트
  2. 버터 살짝 바르기 (5g)
  3. 캐나디언 베이컨 올리기 (실온에 30분 둔 것)
  4. 포치드 에그 조심스럽게 올리기
  5. 홀랜다이즈 2큰술 듬뿍
  6. 파슬리, 파프리카로 마무리

에그베네딕트의 가족들

에그 플로렌틴

시금치가 주인공. 캐나디언 베이컨 대신 볶은 시금치.

에그 로얄

연어가 주인공. 훈제 연어의 고급스러움.

에그 허사드

뉴올리언스 스타일. 홀란드 러스크와 보르들레즈 소스.

에그 코숑

역시 뉴올리언스. 풀드포크 대신 캐나디언 베이컨.

K-베네딕트의 탄생

김치 베네딕트

"이건 좀 이상한데..."라고 생각했지만 의외로 잘 어울렸다. 신김치의 산미가 홀랜다이즈의 무거움을 잡아준다.

과학적 분석:

  • 김치의 젖산(pH 4.2)이 홀랜다이즈의 버터 무거움 중화
  • 캡사이신이 미각 수용체 자극, 풍미 증폭
  • 발효 유산균이 소화 도움

불고기 베네딕트

달콤짭짤한 불고기와 크리미한 홀랜다이즈. 동서양의 만남.

간장의 글루탐산 + 홀랜다이즈의 유지방 = 감칠맛 폭발

전주비빔밥 베네딕트

나물들과 고추장 홀랜다이즈. 이건 정말 혁명이었다.

7가지 나물의 조화로 식감 대비 향상

갈비 베네딕트

LA갈비를 잘게 찢어 올린 버전.

홀랜다이즈가 고기의 기름기를 중화하며 조화로운 밸런스

에그베네딕트가 가르쳐준 것

실패의 가치

312번의 실패. 그 중에서도 잊을 수 없는 건 크리스마스 브런치 사건이다.

가족 20명을 위한 에그베네딕트. 자신만만하게 시작했는데, 홀랜다이즈가 대량으로 분리되어버렸다.

"에그 스크램블드 베네딕트예요. 새로운 스타일이죠."

다들 웃으며 먹어주었다. 실패도 추억이 되는 법이다.

인내의 미학

홀랜다이즈는 서두르면 망한다. 버터 한 방울 한 방울이 노른자와 완전히 섞일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87번째 실패 후 깨달았다:

  • 1초에 버터 3ml = 실패
  • 1초에 버터 2ml = 성공

단 1ml의 차이. 하지만 그 1ml가 전부다.

브런치의 철학

브런치는 시간의 사치다. 아침도 점심도 아닌 그 사이, 여유로운 시간.

에그베네딕트는 그 시간의 왕이다. 만들기 까다롭고, 식으면 맛없고, 혼자 먹기엔 너무 풍성한.

그래서 더 특별하다.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하는 느긋한 시간. 그게 브런치고, 그게 에그베네딕트다.

마지막 한 입

어제도 에그베네딕트를 만들었다. 313번째.

홀랜다이즈는 살짝 묽었고, 포치드 에그 하나는 노른자가 터졌다. 하지만 가족들의 표정은 행복했다.

"숙취의 구원자에서 브런치의 왕이 되기까지."

레뮤엘 베네딕트가 이 요리의 역사를 알았다면 놀랐을 것이다. 자신의 숙취 해소 음식이 100년 후 전 세계 브런치 메뉴의 스테디셀러가 될 줄이야.

오늘도 노른자는 흐른다. 황금빛 강물처럼, 시간처럼, 인생처럼.

그리고 우리는 그 흐름 속에서 작은 행복을 찾는다.

기술은 수단일 뿐. 목적은 행복이다.